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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글

또 하나의 일을 내려 놓았다.

by 만사ok농부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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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다는건 하나씩 하나씩 내려 놓는 거라고 한다는데 나는 하나를 내려 놓는게 짐을 덜기 위한게 아니고 짐을 더 하기 위해서 이니 그리 편한 일만은 아니다.

지역 거주민들로 결성된 당포경작 조합 총무자리를 내려 놓았습니다.

이 단체는 일제 때부터 있었던 8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 수리 조합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간척지를 개발하면서 지역 주민들이 거주민의 권리와 농업기반을 유지 보수 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인데 지역민들의 역사가 담겨 있는 단체죠.

33년전 수세 투쟁을 할때도 이곳 많은 비켜 갔다.

이곳은 자체 수리 조합이 있었으니 비싼 물세를 안내고 농사를 짖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세 투쟁이란

 

전남 해남 농민 이웅배(60)씨는 25일 군민 3천여명이 읍내로 몰려나왔던 33년 전의 감동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1987년 6·10항쟁 직후 노동자·농민 대투쟁 때 해남부당수세거부 추진위원회(이하 해남수추위) 총무를 지냈다. 27살이던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에서 3년째 농사를 짓는 중이었다.

“벼농사는 물이 없으면 못 짓잖아요. 일제는 수리조합을 설치해 가혹한 수세를 거둬갔고, 해방 이후 농지조합까지 이런 수탈이 이어졌어요. 80년대 들어 1단보(300평) 벼 40~60㎏까지 올라간 수세에 대한 원성이 하늘을 찔렀지요.”

그는 1987년 해남와이(YMCA)농어민회에서 수세싸움을 하기로 결정하자 자료를 모으고 조직을 다졌다. 그는 이듬해 예비군 훈련에 가서 수세의 부당성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렸다가 군당국에 체포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회원 30여명과 수세싸움을 준비했다.

“87년 11월26일 해남 장날을 맞아 부당수세거부 군민결의대회를 열었어요. 물꼬만 틀어놓고 수세를 받아가는 농조(농지조합)에 맞서 싸우자는 유인물 2천장을 찍었는데 3천명이 몰려나왔어요. 동학 이래 최대의 농민 인파라고 다들 깜짝 놀랐지요.”

그는 “예부터 치수는 국가 책임이다. 한 가구 부채가 400만원인데 한해 8만원 넘게 수세를 짜내가니 견디기 어렵죠. 평소에는 위세에 눌려 말도 못하다가 가려운 데를 긁어주니까 농민 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라고 말했다.

해남수추위는 이날 결의대회를 시작으로 3년 동안 수세싸움을 끈질기게 벌였다. 10여차례의 군민 1천여명 이상이 참여하는 집회를 열어 수세납부 거부, 고지서 소각, 차압딱지 반납, 수세폐지 서명 등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수세싸움이 전국으로 번지자 노태우 정부는 긴장했어요. 수세를 87년 23㎏에서 88년 10㎏, 89년 5㎏으로 낮추겠다고 물러섰지요. 현산면 오분임(당시 51)씨가 미납 수세를 받으러 왔던 농조직원을 향해 ‘수세는 죽어도 못내니 지금까지 냈던 수세를 돌려 달라’며 쫓아냈던 장면은 지금도 또렷해요.”

해남의 싸움은 이듬해 강진, 함평, 장흥, 나주 등으로 번지며 전국 동시다발 수세투쟁의 불을 댕겼다. 농민들은 1989년 2월13일 서울 여의도에서 2만여명이 참여하는 전국농민대회를 열었다. “해남에서도 버스 16대에 타고 700여명이 올라갔어요. 오가는 데 7시간씩 걸리는 버스 안에서 일제 강점기 때 수세를 여태 거둔다며 성토가 대단했지요. 이 싸움으로 윤치영(작고) 해남수추위장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수세를 경감하고, 2년분은 결손처리해주는 등 승리했어요.”

수세싸움에서 이긴 농민들은 1990년 전국 처음으로 해남군농민회를 결성해 생존권 투쟁에 앞장섰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수세를 완전히 폐지하고, ‘농조’를 농어촌공사에 통폐합했다.

“그때 싸우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수세를 내고 있지 않을까요. 늙을 때까지 농사 지으면 골병, 빚, 천대를 면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거 같아요. 농업·농촌문제는 농민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교훈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지역은 그보다 훨씬 전에 온지역 사람이 똘똘뭉쳐 우리물은 우리가 관리 하니 수세를 낼 수 없다고 하여 수세를 내지 않고 있었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 오는 것이다.

물론 그냥 안내 지는 않았다.

작은 지역이지만 엄청난 투쟁을 했다. 심지어 아녀자들이 저수지에서 옷을 다벗고 관리자들이 못 오게 막기까지 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많이 위축되기는 했지만 그런 경작 조합 총무일을 4년 동안 했으니 영광이다.

긴 회의를 마치고 식당에서 점심중

전에는 돼지잡아서 온 지역 축제 였으나 지금은 소소 하게 식당에서 뒷풀이 합니다.

어르신들이 많으니 아들 장가가게 된 제가 커피수발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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